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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7. 7世 〉18. <부정공>이로재상량문(履露齋上樑文)
1. 문헌 목록 〉7. 7世 〉20. <부정공>주강재기(住崗齋記)휘지강(諱智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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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부정공>증가선대부이조참판공휘지강묘갈명(贈嘉善大夫吏曹參判公諱智崗墓碣銘)
贈嘉善大夫吏曹參判公諱智崗墓碣銘 玉川之南昇州住巖洞後麓負乙而向辛爲四尺之封者故嘉善大夫吏曹參判玉川趙公諱智崗 配貞夫人晋州姜氏宜屨之藏也今距公之沒己四百餘載矣舊有短碣而石蝕字泐公之考友善行懿蹟無以考其實將恐或是之湮沒則爲後承者寧不愴惜哉方具石而改竪之意門議累發鳩財運石後孫鉉秀淵台東官龍勳來余問所以顯刻余辭不獲謹按玉千之趙以高麗光祿大夫檢校大將軍諱璋爲上祖高祖諱佺贈三重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曾祖諱元吉檢校門下侍中兼典工判書諡忠獻祖諱瑜字兪玉號虔谷中顯大夫典農寺副正考諱斯文通政大夫吏曹參議妣淑夫人靑山鄭氏叅軍尚周女公生而天資寬厚氣宇秀朗智勇過人官至宣畧將軍忠武衛司果晩年以子琛之貴推恩贈嘉善大夫吏曹參判性本純孝自幼有扇枕懷橘之志晨昏定省皆適其節山樵水漁入厨供旨皆適其口事無大小必諮禀而後行篤友兄弟築一亭于謙川之上名之曰相好春暖秋涼昕夕相聚融融然盡其和怡怡然篤其愛長枕同衾寝興於斯良辰美景觴咏于斯埍唱箎知重其所生樂其所事敍一氣之至樂而不知外世榮辱其友于之篤奚獨專美於椿津假寐吾實撫背也惟或有過北之者則是以南州好古之士至今誦之爲美也噫今距公之世四百有年之久而有此追擧其繼述之孝極可欽歎畧敍其世系源流謹爲之銘銘曰鬱彼住巖之麓是公衣屨之藏承襲孝友出於天植其學亦優不求聞達靈芝有根醴泉有源非孝曷存非悌曷恩我辭非誣文獻可徵 檀紀四千三百三十一年戊寅臘月 日 羅州 丁性杓 謹識 증가선대부이조참판공휘지강묘갈명(贈嘉善大夫吏曹參判公諱智崗墓碣銘) 옥천(玉川:淳昌) 남쪽 승주(昇州) 주암동(住巖洞) 뒷산 을좌(乙坐)무덤은 고(故)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조공(趙公) 휘(諱) 지강(智崗)과 배위(配位)정부인(貞夫人) 진주강씨(晋州姜氏)의 묘이다. 지금 공께서 돌아가신 지 四백여 년이 되었는데 옛날 작은 비석이 있었으나 마멸(磨滅)되어 공의 효우(孝友) 선행(善行)과 아름다운 행적의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장차 혹 인멸(湮滅)이라도 된다면 후손들이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 비석을 세우자는 의론이 여러 차례 나와 재산을 모으고 돌을 운반해 놓고는 후손 현수(鉉秀)·연태(淵台)·동관(東官)·용훈(龍勳)이 나에게 와서 비문을 청하는데 사양할 수가 없다. 삼가 상고하건대 옥천조씨(玉川趙氏)는 고려(高麗)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휘(諱) 장(璋)을 시조로 하는데 고조(高祖) 휘 전(佺)은 증 삼중대광(贈 三重大匡) 보국광록대부(輔國光祿大夫)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이요 증조(曾祖) 휘 원 길(元吉)은 검교문하시중 겸 전공판서(檢校門下侍中兼典工判書) 시호(諡號) 충헌(忠獻) 이며 할아버지 휘 유(瑜)는 자(字)가 유옥(兪玉) 호 건곡(虔谷)으로 중현대부(中顯大夫)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이요 아버지 휘 사문(斯文)은 통정대부(通玫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이시며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청산정씨(靑山鄭氏)는 참군(叅軍) 정상주(鄭尚周)의 따님이시다. 공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기개(氣概)가 맑고 수려(秀麗) 하셨으며 용맹이 남달랐다. 벼슬이 선략장군(宣略將軍) 충무위사과(忠武衛司果)에 이르렀는데 만년에 아들 침(琛)의 추은(推恩)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셨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부채질을 해드리고 좋은 음식을 보면 품에 넣었다가 바칠 줄을 알았으며 아침저녁으로 문안(問安)을 올리는 것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물고기를 잡고 땔나무를 해다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입맛에 맞게 하였으며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여쭌 후에 행하였다. 형제들과 우애(友愛)가 돈독하여 정자 하나를 겸천(謙川) 위에다 지어 상호정(相好亭)이라 이름하고는 따뜻한 봄날과 서늘한 가을에 조서(朝夕)으로 모여 화락(和樂)하게 지내며 우애를 돈독하게 다졌으며 긴 이불을 함께 덮고 한 베개를 베고 이곳에서 잠을 잤다.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이곳에서 술을 마시면서 시(詩)를 서로 화답하여 소생(所生)을 중히 여기고 일을 즐겼으며 동기(同期)간의 지극한 즐거움을 누려 바깥세상의 영욕(滎辱)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 독실한 우애는 어찌 술이 취해 돌아온 형을 부축해 방안에 눕히고 문 밖에서 선잠을 자며 살피다가 문안한 북조(北朝)사람 춘(椿)과 진(津)형제나 날씨가 추워지면 형의 등을 만져보며 의복이 엷지나 않은 지 살펴 본 송(宋)나라의 사마온공(司馬溫公) 형제의 우애에 뒤지겠는가? 혹 그들보다 더하였다고 할 수도 있어 남쪽의 옛사람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지금까지도 그 일을 외고 있다. 아 지금 공께서 서거(逝去)하신 지 四백여 년이 되었는데도 이처럼 비석을 세우니 조상을 계술(繼述)하는 효성이 매우 감탄스러워 이에 대략 그 세계(世系)와 원류(源 流)를 적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울창한 저 주암 뒷산에 鬱彼住巖之麓 공의 무덤이 있다네 是公衣履之藏 천성에서 나온 효성과 우애 이어받고 承襲孝友出於天 학문 역시 넉넉하였지만 영달 바라지 않았네 植其學亦優不求聞達 영지는 뿌리가 다르고 예천은 근원이 있네 靈芝有根醴泉有源 효도와 우애 아니면 어찌 이런 은혜 있으리 非孝曷存非悌曷恩 내 말이 거짓 아니요 문헌에서 볼 수 있네 我辭非誣文獻可徵 단기(檀紀) 사천삼백삼십일년 무인(戊寅) 섣달 나주(羅州) 정성표(丁性杓)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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